미북 비핵화 협상이 교착국면에 빠진 가운데 북한 매체들이 최근 들어 ‘자력갱생·간고분투’,‘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자력갱생·간고분투’ 정신은 경제적 위기를 외부의 지원 없이 자체의 자원과 기술로 극복해 나가는 경제운영 방식이다. 1979년 김정일이 제시한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구호는 덩샤오핑 집권 이후 중국에서 유입되는 개혁개방 사조를 막기 위해 고안해낸 이론이다. 북한이 자력갱생과 우리식대로 살자는 구호를 동시에 강조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미국의 대북제재 장기화에 피로감을 느낀 북한이 한편으로 제재 완화를 줄기차게 요구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자력갱생’ 전략으로 이를 극복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또 격변하는 대외환경 속에서 주민들의 개혁개방 분위기 확산에 따른 내부동요를 막고 기강을 다지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폼페이오 방북에도 미국의 대북제재 강화되자 자력갱생,우리식 전략 꺼내 든 것.
북한 매체들이 ‘자력갱생·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이뤄진 지낞 ㅐ10월부터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10월 13일 ‘최후승리를 이룩할 때까지 들고나가야 할 전략적 구호’라는 제목의 논설에서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라며 “우리 인민은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를 더욱 높이 추켜들고 자력갱생,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조국번영의 대로를 활짝 열어나갈 것”이라고 역설했다. 미국 재무부가 수정한 대북제재 명단 정보에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문구를 새롭게 추가하는 등 대북제재 수위를 강화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10월 7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면담 했지만 미국은 대북제재 강화조치로 비핵화에 미온적인 북한을 압박한 것이다.
노동신문은 지난해 11월 8일로 예정됐던 미북 고위급회담이 무산된 직후인 11월 9일 1면의 절반을 할애해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이 구호를 더 높이 추켜들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을 힘있게 다그치자’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신문은 “우리 당과 인민은 제국주의자들의 압력 속에서도 자주·자립·자위의 혁명로선을 철저히 구현해왔다”며 “남들이 수정주의 바람에 현혹돼 혁명을 망쳐먹을 때도 끄떡없이 오늘도 자기의 신념에 따라 사회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 인민은 제국주의자들의 끈질긴 제재봉쇄 책동도 교활한 심리 모략전도 절대로 통할 수 없다”며 “우리식대로 살아나간다는 김일성-김정일 주의는 자주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혁명사상이며 유일한 지침이다”고 강조했다.
또 이날 노동신문 논평 면에는 ‘자력갱생으로 영원히 승리떨쳐갈 것이다’는 제목의 논평이 게재됐다. 논평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운 속에서도 경제건설 대진군을 힘차게 벌리는 우리 인민의 투쟁 모습에 국제사회가 경탄하고 있다”며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은 이 땅에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운 위대한 변혁의 힘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노동신문은 지난달 22일에도 “자력갱생, 간고분투는 우리 인민의 불변의 투쟁방식, 창조본때이며 최후승리의 원동력”이라며 “자강력제일주의의 기반은 자기 나라 혁명은 자체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혁명사상이며 자강력제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방식은 자력갱생, 간고분투”라고 역설했다. 북한 매체의 자력갱생 타령은 12월에도 이어졌다. 12일 노동신문은 ‘자력갱생, 간고분투’라는 제목의 정론을 통해 “우리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막아보려는 적대세력의 발악이 극도에 달할수록 더욱 고조되는 것이 자력갱생만이 살 길이라는 신념과 의지”라고 하면서 자력갱생을 ‘우리 국가와 인민의 백년대계의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13일에는 평양에서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사상으로 전당을 일색화’하기 위한 중앙연구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이 지나치게 ‘자력갱생·우리식대로 살자’를 강조하면서 협상판을 깨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전 장관은 14일 노동신문 등 북한 공식 매체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자력갱생’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각종 국산화 사업을 거론하며 “제재 대처하기 위해 고비용의 과도한 국산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며 이는 “일반적, 보편적 수준의 자립경제를 넘어서고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통한 번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고립주의 노선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북한이 판을 완전히 깨진 않겠지만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 조치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여기서 양보하면 끝장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력갱생 강조가 대북제재가 장기화 될 경우 북한 최악의 경제난으로 불리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북소식통은 “벌써부터 대북제재 영향으로 북한 시장에 구매자 보다 판매자가 더 많은 상황”이라며 “제재가 장기화 되면 고난의 행군에 버금가는 경제난이 올 수 있다”고 했다. 북한 매체들도 “미국의 반공화국제재압박소동은 그 악랄성과 반동성에 있어서 역대 최고수준이라고 볼수 있다”며 대북제재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이후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 논의는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북제재 국면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선(先) 대북제재 완화 요구에 선을 긋는 한편 “급할 것이 없다”며 핵 협상 장기화를 예고한 상황이다. 여기에 대북 인권압박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북한이 강조하는 자력갱생 전략은 내년도 김정은의 신년사에도 반영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김정은의 신년사는 북한의 한 해 청사진으로 대남·대미(對美) 정책뿐 아니라 내부 통치를 위한 구상이 담긴다.
내년 신년사에서는 비핵화나 대미 관련 전향적인 메시지 보다 미국과의 핵 협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대북제재 극복을 위한 자력갱생 방안이나 국가경제발전 5개년계획 수행 등의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최근 북한 매체에서 미국에 시간으로 맞서겠다는 메시지가 나왔는데, 이는 제재 완화 등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으면 북한도 버티기를 하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런 기조에서 신년사에 비핵화나 대미 관계에 대한 전향적 메시지가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풍계리 핵실험장 및 동창리 미사일 실험장 폐쇄와 미군 유해 송환 등 자신들이 취한 ‘선제적 조치’에 미국이 제재 완화로 응답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2018년 12월.